전쟁 같은 맛 Tastes Like War 그레이스 M 조 지음
중앙SUNDAY
활기찬 이민자였던 엄마의 조현병
입력2023.06.24. 오전 12:45

전쟁 같은 맛
전쟁 같은 맛
그레이스 M 조 지음
주해연 옮김
글항아리
이 회고록은 고전적으로 표현하면 ‘사모곡’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저자의 어머니는 상선의 선원이었던 백인 남성과 결혼해 두 자녀를 데리고 1970년대 초 미국으로 이주한 한국인이다. 동양인이 거의 없던 워싱턴주 시골 마을에서 ‘중국여자’ 운운하는 편견 어린 시선을 받으면서도, 부지런히 일하며 삶을 일궜다.
딸의 돌잡이 땐 연필을 쥐게 유도하고, 그 자신은 요리를 잘했어도 어린 딸이 무심코 ‘요리사’가 꿈이라고 했을 땐 실망하며 화를 낸 어머니이기도 했다. 그 딸인 저자는 미국의 명문 대학을 나온 박사로 인류학·사회학 교수가 됐다. 어쩌면 어머니 바람대로 잘 자란 교포 2세나 혼혈 2세로 보일 수도 있겠다.
허나 이 책은 미국 사회에서 이민자나 소수자가 거둔 성공담이 아니다. 저자는 여러 시기의 기억을 교차하며 어머니와 그 자신이 살아온 삶의 내밀하고도 힘겨웠던 면면을 드러낸다. “사는 동안 내게는 적어도 세 명의 엄마가 있었다”는 대목이 이를 압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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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삶에 대해 알고 난 뒤 저자는 한인 디아스포라에 관한 연구를 해왔다. 사진은 1970년대 송탄 기지촌 모습. [사진 글항아리]
첫째로 그의 유년기 엄마는 활력이 넘치는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저자가 학교에 갈 나이가 되자, 각종 음식 장만은 물론이고 옷감을 끊어다 드레스까지 직접 만들어 입고 지역 교사들을 위한 파티를 열었다. 동네 숲에서는 철마다 블랙베리나 각종 버섯을 산더미처럼 채취해 가공하거나 팔았다. 미국 생활 초기부터 현지의 온갖 요리법을 열심히 익히면서도, 동네 가정에 한국 입양아가 오거나 하면 김치부터 담가 선물했다.
어머니가 달라진 건 저자가 열다섯 살 무렵부터. 환청을 비롯해 조현병 증상이 시작됐지만, 여러 사정으로 다른 가족들은 그 심각성을 절감하지 못했다. 고교생이던 저자는 혼자 정신질환 상담시설을 찾아가는 등 별별 방식으로 도움을 구했으나 기대는 번번이 좌절됐다. 그 순간을 저자는 놀랍게도 “내 한(恨)의 시발점”이라는 한국식 표현으로 전한다. 조현병 전반, 특히 그 사회적 요인에 대해 미국 사회는 물론 의학계의 연구와 시선도 지금과 다를 때였다.
이에 앞서 저자는 미국 이주 전 어머니의 삶에 대한 몇몇 사실들을 독자에게 들려준다. 어머니는 1941년생, 어린 나이에 일제강점과 한국전쟁을 겪은 세대다. 가족의 강제징용으로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고, 전쟁 통에 부친과 오빠를 잃었다. 세 자매 중 언니는 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저자는 어머니나 이모가 단편적으로 들려준 이야기들, 그리고 여러 학문적 연구 등을 통해 접한 사실들을 결합하며 어머니가 살아왔을 삶을 독자들이 가늠하게 한다.
이를 통해 전쟁의 비극과 더불어 이후 한국 사회가 망각할 수 없는, 망각해서도 안 되는 모습들이 드러난다. 저자는 혼혈아에 대한 한국 사회의 편견과 차별, 국가적 차원에서 장려된 해외 입양, 그리고 미군 기지촌 여성들에 대해 최근 한국 법원이 국가 책임을 인정한 판결도 거론한다. “어머님이 매춘을 하셨었어요.” 이 책의 중반쯤에 나오는 누군가의 말이다. 이를 통해 저자는 어머니가 부산의 미 해군 기지촌 클럽에서 일하며 성매매도 했으리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된다. 그 슬픔과 수치심과 충격은 저자를 관련 연구로도 이끄는데, 이미 여러 해 조현병을 앓아온 어머니는 외출을 전혀 않고 방 안에서만 지낼 때였다. 저자가 “사회적 죽음”이라 부르는 상태였다.
이런 어머니와 딸의 소통에 그나마 매개가 되는 것이 음식. 어머니는 더는 음식을 하지도, 때로는 먹으려 하지도 않았다. 어머니의 뜻과 달리 베이킹을 배우러 다닌 저자는 어머니가 잘하던 블랙베리 파이를 비롯해 어머니를 위해 음식을 하기 시작한다. 어느새 어머니가 불러주는 조리법대로 생태찌개 같은 한국음식도 만든다. 치즈버거도 있다. 훗날 이혼과 별거에 이르기 전, 한국에서 처음 데이트할 때 어머니가 주문한 메뉴이자 그 모습에 아버지가 더욱 반했던 음식이기도 하다.
책 제목의 “전쟁 같은 맛”은 분유를 두고 어머니가 했던 말이다. 가족들이 준비해 놓은 간편식 중에도 분유만큼은 전혀 손대지 않았던 어머니는 이렇게도 말했다. “그 맛은 진절머리가 나.” 저자가 문헌 자료를 통해 일러주는 대로, 분유는 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주요 원조 식량이었다.
어머니는 예순여섯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저자의 비통함은 상실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쓰기 시작한 이 책에도 절절히 드러난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그는 글을 쓰는 내내 어머니를 피해자로만 보는 것도, 이민자들이 미국에 빚을 지고 있으니 이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도, 다른 가족들이 수치스럽게 여겨 말하지 못했던 일들에 대해 침묵을 지키는 것도 거부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사모곡만 아니라 씻김굿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2021년 미국에서 출간돼 전미도서상 논픽션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던 책이다. 원제 Tastes Like War.
이후남 기자 hoon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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