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시행의 뉴욕 드라이브] 아시아계 증오범죄 표적될라… 한인들 “공원 산책도 겁나”
뉴욕=정시행 특파원
입력 2022.02.16 03:00 | 수정 2022.02.16 03:00
지난 14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시 맨해튼 중심가의 한 지하철역. 승차권을 끊고 어두컴컴한 역사(驛舍)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플랫폼에 서 있던 승객 10여 명의 눈길이 일제히 기자에게 쏠렸다가, 이내 안도하듯 시선을 돌렸다. 사람들은 양방향 선로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플랫폼 가운데에 몰려 있거나, 벽에 등을 기대고 서서 지하철을 기다렸다.
뉴요커들의 이런 행동은 최근 익숙해진 풍경 중 하나다. 지난달 15일 타임스스퀘어 역에서 월가 컨설팅사에 근무하는 40세 중국계 여성이 정신 질환이 있는 노숙자에게 떠밀려 달려오는 열차에 치여 사망한 뒤 더욱 심해졌다. 뉴욕엔 서울 지하철 같은 스크린 도어가 없다. 뉴욕의 필수 교통수단인 지하철을 타게 될 때마다 “정말 타야 하나”라며 불안감에 휩싸인다. 어쩔 수 없이 탑승한 후에는 초긴장 상태로 주변을 살피는 게 일상화됐다.
지하철만 불안한 게 아니다. 이날 자주 가는 식료품점에 들렀더니 ‘쇼핑 후 차에 물건을 실을 땐 반드시 귀중품부터 넣고 빨리 차 문을 잠그라’는 안내문을 나눠줬다. 무슨 일인지 묻자 점원은 “최근 한국계 중년 여성이 혼자 쇼핑을 한 뒤 트렁크에 물건을 싣는 사이 핸드백을 도난당했다”며 “점포 내 상품 절도도 급증해 골치”라고 답했다.
미 최대 도시 뉴욕에서 살인과 강도, 폭력 등 강력 범죄가 급증하고 있다. 지난해 연방수사국(FBI)에 따르면,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된 이래 미 전역에서 살인이 30% 급증, 1960년대 이래 최대 증가 폭을 기록했다. 뉴욕과 LA 등 대도시에선 증가치가 두 배에 달했다.
그 원인을 두고 진보 진영에선 “불법 총기가 많이 풀리고, 사회복지 예산 부족으로 노숙자나 전과자 관리가 안 된 탓”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보수 진영은 “‘흑인 목숨은 소중하다(BLM)’ 시위 여파로 경찰 권한을 제한하면서 치안 공백이 커진 탓”이라고 한다. 워싱턴포스트는 “미 전역에서 경찰 예산이 축소되고 경찰 사기도 떨어져 치안 인력이 부족하다”며 팬데믹이 불러온 사회적 갈등 요소가 한꺼번에 닥치며 ‘범죄의 퍼펙트 스톰’을 일으키고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아시아계 시민이 이런 팬데믹 분노의 ‘약한 고리’로 떠올랐다. 지난해 미 대도시 16곳에서 아시아계를 상대로 한 범죄가 159% 늘었는데, 뉴욕에서는 450% 폭증했다. 아시아계 시민은 숫자가 적은 데다 체구가 작고, 신고나 보복을 꺼리는 경향이 있어 다인종 사회인 미국에서 손쉬운 범죄 표적이 돼온 게 사실이다. 게다가 “코로나는 중국 바이러스”라는 일부 정치인의 선동으로 아시아계 전체가 왠지 모를 불안에 떨며 살고 있다.
한국 교민과 주재원들은 대부분 인종차별 경험담을 한두 개씩 갖고 있다. 뉴욕에서 사업하는 한 60대 교민은 “2년 전부터 ‘중국인이냐’고 묻는 야릇한 시선 때문에 가방 등 소지품에 일부러 태극기를 달고 다닌다”고 했다. 기자 역시 지난해 맨해튼 하이라인 파크를 걷다가 인근 아파트에서 누군가 자갈과 쓰레기를 던지는 일을 겪은 적 있다. 동양인이라 당한 일인지 확실하진 않지만 그 이후론 길을 걸을 때 전후좌우를 살피고, 으슥한 곳은 피하게 된다.
지금 한인 사회는 패닉 상태다. 지난 9일 맨해튼 코리아타운 인근에서 주유엔 한국대표부 소속 50대 남성 외교관이 낯선 이에게 ‘묻지 마 폭행’을 당해 코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노약자나 여성이 아니라 건장한 남성이 길거리 폭행을 당한 건 드문 일이다. 이어 13일엔 맨해튼 남동부 차이나타운의 집으로 가던 한국계 미국인 여성 이모(35)씨가 집 안까지 뒤따라온 노숙자에게 흉기로 살해당하는 충격적 사건이 일어났다.
한인들은 “저녁 약속을 다 취소했다. 공원 산책조차 겁난다” “세금 꼬박꼬박 내고 의무를 다하는데 숨죽여 지내는 게 화난다”며 들끓고 있다. “길 다닐 때 낯선 이의 인기척을 느낄 수 있도록, 후드티를 뒤집어쓰거나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지 말라” “누가 뒤에서 따라오는 것 같으면 집으로 가지 말고 사람 많은 곳을 향하라”는 조언도 공유하고 있다. 14일엔 중국계 뉴요커들이, 15일엔 뉴욕 한인회가 피해자 이씨 집 인근에서 아시아 증오 범죄 규탄 대회를 열었다. 뉴욕시장과 뉴욕주지사도 “증오 범죄를 좌시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1992년 LA 폭동 이후 가라앉았던 한인과 흑인 간 갈등이 표출될 가능성도 있다. 지난해 조지아주 애틀랜타 마사지숍에서 한인 여성 등 8명이 백인 남성의 총격에 살해된 일을 제외하곤, 공교롭게 뉴욕 등 대도시에서 잇따른 아시아계 대상 범죄 가해자가 대부분 흑인이었기 때문이다. 한인 사회에선 ‘BLM 시위 당시 아시아계가 흑인 사회를 지원했는데, 그에 상응하는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불만이 큰 것으로 전해졌다.
[정시행의 뉴욕 드라이브] 아시아계 증오범죄 표적될라… 한인들 “공원 산책도 겁나”
뉴욕=정시행 특파원
입력 2022.02.16 03:00 | 수정 2022.02.16 03:00
지난 14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시 맨해튼 중심가의 한 지하철역. 승차권을 끊고 어두컴컴한 역사(驛舍)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플랫폼에 서 있던 승객 10여 명의 눈길이 일제히 기자에게 쏠렸다가, 이내 안도하듯 시선을 돌렸다. 사람들은 양방향 선로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플랫폼 가운데에 몰려 있거나, 벽에 등을 기대고 서서 지하철을 기다렸다.
뉴요커들의 이런 행동은 최근 익숙해진 풍경 중 하나다. 지난달 15일 타임스스퀘어 역에서 월가 컨설팅사에 근무하는 40세 중국계 여성이 정신 질환이 있는 노숙자에게 떠밀려 달려오는 열차에 치여 사망한 뒤 더욱 심해졌다. 뉴욕엔 서울 지하철 같은 스크린 도어가 없다. 뉴욕의 필수 교통수단인 지하철을 타게 될 때마다 “정말 타야 하나”라며 불안감에 휩싸인다. 어쩔 수 없이 탑승한 후에는 초긴장 상태로 주변을 살피는 게 일상화됐다.
지하철만 불안한 게 아니다. 이날 자주 가는 식료품점에 들렀더니 ‘쇼핑 후 차에 물건을 실을 땐 반드시 귀중품부터 넣고 빨리 차 문을 잠그라’는 안내문을 나눠줬다. 무슨 일인지 묻자 점원은 “최근 한국계 중년 여성이 혼자 쇼핑을 한 뒤 트렁크에 물건을 싣는 사이 핸드백을 도난당했다”며 “점포 내 상품 절도도 급증해 골치”라고 답했다.
미 최대 도시 뉴욕에서 살인과 강도, 폭력 등 강력 범죄가 급증하고 있다. 지난해 연방수사국(FBI)에 따르면,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된 이래 미 전역에서 살인이 30% 급증, 1960년대 이래 최대 증가 폭을 기록했다. 뉴욕과 LA 등 대도시에선 증가치가 두 배에 달했다.
그 원인을 두고 진보 진영에선 “불법 총기가 많이 풀리고, 사회복지 예산 부족으로 노숙자나 전과자 관리가 안 된 탓”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보수 진영은 “‘흑인 목숨은 소중하다(BLM)’ 시위 여파로 경찰 권한을 제한하면서 치안 공백이 커진 탓”이라고 한다. 워싱턴포스트는 “미 전역에서 경찰 예산이 축소되고 경찰 사기도 떨어져 치안 인력이 부족하다”며 팬데믹이 불러온 사회적 갈등 요소가 한꺼번에 닥치며 ‘범죄의 퍼펙트 스톰’을 일으키고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아시아계 시민이 이런 팬데믹 분노의 ‘약한 고리’로 떠올랐다. 지난해 미 대도시 16곳에서 아시아계를 상대로 한 범죄가 159% 늘었는데, 뉴욕에서는 450% 폭증했다. 아시아계 시민은 숫자가 적은 데다 체구가 작고, 신고나 보복을 꺼리는 경향이 있어 다인종 사회인 미국에서 손쉬운 범죄 표적이 돼온 게 사실이다. 게다가 “코로나는 중국 바이러스”라는 일부 정치인의 선동으로 아시아계 전체가 왠지 모를 불안에 떨며 살고 있다.
한국 교민과 주재원들은 대부분 인종차별 경험담을 한두 개씩 갖고 있다. 뉴욕에서 사업하는 한 60대 교민은 “2년 전부터 ‘중국인이냐’고 묻는 야릇한 시선 때문에 가방 등 소지품에 일부러 태극기를 달고 다닌다”고 했다. 기자 역시 지난해 맨해튼 하이라인 파크를 걷다가 인근 아파트에서 누군가 자갈과 쓰레기를 던지는 일을 겪은 적 있다. 동양인이라 당한 일인지 확실하진 않지만 그 이후론 길을 걸을 때 전후좌우를 살피고, 으슥한 곳은 피하게 된다.
지금 한인 사회는 패닉 상태다. 지난 9일 맨해튼 코리아타운 인근에서 주유엔 한국대표부 소속 50대 남성 외교관이 낯선 이에게 ‘묻지 마 폭행’을 당해 코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노약자나 여성이 아니라 건장한 남성이 길거리 폭행을 당한 건 드문 일이다. 이어 13일엔 맨해튼 남동부 차이나타운의 집으로 가던 한국계 미국인 여성 이모(35)씨가 집 안까지 뒤따라온 노숙자에게 흉기로 살해당하는 충격적 사건이 일어났다.
한인들은 “저녁 약속을 다 취소했다. 공원 산책조차 겁난다” “세금 꼬박꼬박 내고 의무를 다하는데 숨죽여 지내는 게 화난다”며 들끓고 있다. “길 다닐 때 낯선 이의 인기척을 느낄 수 있도록, 후드티를 뒤집어쓰거나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지 말라” “누가 뒤에서 따라오는 것 같으면 집으로 가지 말고 사람 많은 곳을 향하라”는 조언도 공유하고 있다. 14일엔 중국계 뉴요커들이, 15일엔 뉴욕 한인회가 피해자 이씨 집 인근에서 아시아 증오 범죄 규탄 대회를 열었다. 뉴욕시장과 뉴욕주지사도 “증오 범죄를 좌시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1992년 LA 폭동 이후 가라앉았던 한인과 흑인 간 갈등이 표출될 가능성도 있다. 지난해 조지아주 애틀랜타 마사지숍에서 한인 여성 등 8명이 백인 남성의 총격에 살해된 일을 제외하곤, 공교롭게 뉴욕 등 대도시에서 잇따른 아시아계 대상 범죄 가해자가 대부분 흑인이었기 때문이다. 한인 사회에선 ‘BLM 시위 당시 아시아계가 흑인 사회를 지원했는데, 그에 상응하는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불만이 큰 것으로 전해졌다.